4.3과여성 위원회 | ['4.3과 여성'위원회 워크숍] 후기_김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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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주여민회 작성일19-07-10 17:29 조회2,64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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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순씨 기억와 기록 / 증언과 자료
-희움역사관 이인순관장 강의에 붙여
김지혜
증언 : 어떤 사실을 증명함.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 이후,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이 연달아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 법정을 준비하던 시기인 1998~9년 증언채록이 본격화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은 할머니들의 증언을 부정한다. 단지 증언만 있을 뿐 사실관계를 확인시켜 줄 증거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일본은 왜? 라고 하면 너무 당연한 질문인 걸까? 증언의 정의를 이야기한 건 그 이유이다. 물론 할머니들이 일본의 부정이나 사람들의 요구에 맞는 피해자상으로 기억을 재구성하여 증언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할머니들이 피해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복 순 씨”
- 공적이고자 하는 사적인 기억
때는 바야흐로 2006년 7월, 무더운 여름날 복순씨와 처음 만났다. 약속을 잡고 그녀를 만나러 안동시내에서도 40분은 더 가야하는 산골마을을 찾았다. 그녀가 그려준 지도를 아무리 봐도 찾기 힘들었다. 내가 늦어지는 만큼 그녀도 안절부절 몇 번을 집 앞을 오르락 내리락하였다. 그것이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첫 만남에서 그녀와 많은 얘기를 할 수 없었던 건 어쩌면 그런 소문들과 무서웠던 그녀의 인상, 그리고 그녀의 남편 때문이었다.
이후 그녀와 안동 시내를 나들이하고 제주를 여행하며 나누던 이해할 수 없던 그녀의 말들, 그 단편들을 정리해 두었다. 그녀는 아프리카를 다녀왔노라며. 그곳에서 고구마 농사를 짓고, 군인들 옷도 빨아주었다고. 그녀가 아파 대구 곽병원에 입원했을 때, 주사를 못 놓던 간호사를 보며 본인이 주사를 더 잘 놓는다며 위안부로 끌려갔을 때 간호교육을 받았노라 얘기한다.
남편이 죽고 난 후, 그녀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녀의 집을 다시 찾았다. 대구 나들이도 하고 병원도 가보자는 말에 선뜻 따라 나서던 그녀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 얼마나 그리웠을지....
그렇게 찾은 병원, 그녀는 간암이었다. 수술은 잘 되었지만 그녀의 몸이 수술을 견뎌내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2008년 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수술을 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생을 더 오래 이어갈 수 있었을까? 가족들의 원망과 미안함에 그녀의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눈물을 흘리지도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그렇게 그녀의 기억들을 단편적으로 정리했던 것 같다. 그녀의 그 기억들이 사적기억이지만 공적기록이길 바랐던 맘을 담아 그렇게 정리했던 것 같다.
- 기록과 기억의 교차
그녀는 재봉기술자였다. 일본이 더 좋은 조건의 공장으로 보내준다며 사람들을 모았고 그길로 그녀는 인도네시아로 동원된다. 남태평양의 어디쯤이었던 ‘트럭섬’ 그곳이 바로 그녀가 위안부로 지냈던 곳이다.
그녀의 이해할 수 없던 이야기들이 사실로 드러났다. 서울대 인권센터에서 진행한 위안부 자료 발굴 조사과정에서 발견한 한 장의 사진과 승선명부. 그곳에 그녀 복순씨가 있었다. 처음 서울대 인권팀에서 확인을 요청하며 보낸 사진에서 설명할 순 없지만 그녀인, 복순씨가 있었다. 3개월 가량 원적부를 추적하고 추적하며 심정적으론 복순씨인 그녀를 찾아냈다. 그녀였다. 처음 만날 때, 70대였던 그녀가 20대의 복순씨로 말을 걸어왔다. 그제서야 울 수 있었다. 가슴에 대못이 빠진 듯, 니 잘못이 아니다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복순씨를 이야길 할 수 있다
그녀 “인 순 씨”
인순씨는 오랜 시간 가슴에 담아두었던 그녀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들려주었다. 그녀의복순씨가 긴 여행을 떠나던 날, 차마 배웅하지 못하고 눈물도 흘릴 수 없었다고, 그러다 복순씨의 과거와 마주한 날에야 드디어는 울 수 있었다고, 그래서 지금은 복순씨를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온 마음을 담아 운동하고 있는 그녀는 피해자와 함께하는 운동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녀의 복순씨가, 또 다른 그녀들의 삶이, 고통이 밀려들어와 그녀의 삶이, 고통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도망치지 않고 계속 이 운동을 이어나가리라. 그녀에게 그런 사명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 자신이 도망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하는 말이다.
나를 돌아본다. 누구와 같은 순 없지만 아직 비겁한, 어쩌면 계속 비겁할지 모를....